(이 글은 신천식 박사의 저서 桑村先生의 生涯와 思想 에서 발췌한 글임)
상촌 선생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부(父)는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지낸 오 이고, 모(母)는 일직(一直) 손씨(孫氏)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치사(致仕)한 정평공(靖平公) 홍량(洪亮)의 따님이다.
상촌 선생은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2남 4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이름을 자수(子粹)라 하고 자(字)를 거광 이라 하고 호(號)를 상촌(桑村)이라고 하였고,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과거에 합격한 후 관로에 진출하자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고쳤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즐겨하였고 20세가 되던 공민왕(恭愍王) 19년(1370)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고, 이로써 성리학 이념의 실천을 생활의 신조로 삼게 된다.
당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등은 상촌의 학문과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때 상촌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지 일년도 못되어 홀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위중하자 귀향하게 된다. 당시 교관으로 있었던 박상충(朴尙衷)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안동으로 떠나는 상촌을 아쉬워하고 있다.
浩然歸志白雲秋(호연귀지백운추) 돌아가고픈 마음 호연(浩然)하여 백운(白雲)의 가을 같은데,
太學諸生可得留(태학제생가득유)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어떻게 만류할 수 있을 것인가.
侍奉高堂應不暇(시봉고당응불가) 고당(高堂)을 모시자면 필시 겨를이 없을 터이니,
那堪一醉映湖樓(나감일취영호루) 영호루(映湖樓)에서 한번 취해 보고픈 뜻 어찌 견디리.
상촌은 안동(安東)으로 귀향하자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奉養)의 도(道)를 다하였고, 얼마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여묘(廬墓)살이 3년을 지낸다.
상촌의 효행(孝行)이 널리 나라에 알려지자 왕은 정려(旌閭)를 내렸고, 또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여묘(廬墓) 생활을 그리게 하고,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 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에는 선생의 효행(孝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낸 김자수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성격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편모(偏母)를 섬김에 있어 온갖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봉양(奉養)의 도(道)를 다하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묘(廬墓) 3년을 하였는데, 이 동안 한번도 집에 간 일이 없으며, 한번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날마다 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니 지나가는 자와 나무꾼들도 이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애훼(哀毁)함이 극에 이르니 얼마 되지 않아 성정(性情)을 상하기에 이르렀다. 국왕께서는 이를 듣고 가상히 여기시어 정려(旌閭)를 명하시고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출거여도(出居廬圖 : 여묘(廬墓)하는 모양을 화폭에 담은 그림)를 그리게 하고는 이를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 에 게재하도록 하였다.
이후 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이때의 여묘(廬墓)살이를 생각하면서 문익점(文益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위문하고 있다.
始見安東居堊子(시견안동거악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부빙구리자회회)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자득(自得)해 하더구만.
筍生雪裏誠心厚(순생설리성심후)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치하고전효열개)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3년상을 지내고 귀경한 상촌은 공민왕(恭愍王) 23년(1374)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무방(李茂芳)과 밀직부사(密直副使)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서 덕령부주부(德寧府主簿)를 제수받고,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환향(還鄕)할 때 일찍이 성균관에서 이색과 정몽주 등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상촌의 장원급제를 축하하였다.
이때 이색이 장원을 축하하여 지은 시이다.
禹門魚躍一聲雷(우문어약일성뇌) 우문(禹門)에서 어약(魚躍)하니 그 소리 우뢰와 같았는데,
矯矯群龍變化來(교교군룡변화래 ) 꿋꿋하고 날랜 뭇 용들이 크게 변하여 돌아왔구나.
只把高低比頭尾(지파고저비두미) 다만 높고 낮음만 가지고 머리와 꼬리를 정했으니,
若論靈異共胚胎(약논영이공배태) 영이(靈異)함을 논한다면 모두가 함께 배태(胚胎) 했지.
在田政値文明運(재전정치문명운) 밭에 있어도 바로 문명(文明)의 운을 만나게 되는데,
澤物還同燮理才(택물환동섭이재) 만물을 윤택하게 하면 되려 섭리의 인재 같았다네.
最喜病餘參此會(최희병여삼차회) 무엇보다 병 뒤에 이 모임에 참여했음이 기쁜데,
風流往事眼中回(풍류왕사안중회) 풍류의 지나간 일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 다음해에 정언(正言)에 올랐는데, 그는 직언으로 왕을 보필하였다. 이때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 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가 왜(倭)를 밀성(密城)에서 쳐서 수십 구를 참(斬)하니, 우왕이 의복과 술 그리고 말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조민수(曺敏修)가 전(箋)을 올려 사양하므로 왕은 상촌에게 명하여 회답하는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민수(敏修)는 한 도(道)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김해(金海)와 대구(大邱)의 전투에서 비겁하게 패몰(敗沒)하여 사졸(士卒)들을 많이 죽였으니, 밀성(密城)에서 비록 조그마한 승리를 하였다고 하나 공(功)이 죄(罪)를 덮을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의복과 술, 그리고 말을 상(賞)으로 하사하는 것도 이미 지나친 것인데, 이제 또 무슨 회교(回敎)를 내립니까? 또 회교(回敎)는 공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이제 민수(敏修)는 공(功)이 없으니, 감히 명(命)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우왕이 노하여 선생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고 지윤(池奫) 및 대사헌(大司諫) 하윤원(河允源)에게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왕명을 어긴 죄로써 다스리려고 하자, 상촌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간관(諫官)을 둔 것은 임금의 잘못을 보필하기 위한 까닭이다. 옛날부터 왕의 말에 불가(不可)함이 있으면 간관이 이를 간(諫)하는 것이니, 원컨대 제공(諸公)들은 나라에서 간관(諫官)을 둔 뜻을 살피라." 라고 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크게 노하여 장형(杖刑)을 가하여 유배시키려 하여 이를 도당(都堂)에 의논하니, 모든 재상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밀직부사(密直副使) 이보림(李寶林)이 말하기를 "자수(子粹)는 비록 소유(小儒)이나 간관(諫官)이요, 또 소위 왕명을 어겼다는 것도 대개 사람을 동쪽에 두었다가 함부로 서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으니, 자수(子粹)의 죄는 아마도 이것으로써 논하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하니, 도당이 그 말을 "옳다" 라고 하여 단지 유배만을 청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 "순위부(巡衛府)에서 이미 그 죄를 의논하였는데, 이제 다시 가볍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태후(太后)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신(臣)은 무인(武人)이라 일에 밝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신(文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간관(諫官)이 비록 뜻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言路)를 여는 까닭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자수(子粹)의 죄가 적은데도 중론(重論)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태후가 우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늙어 그 동안에 많은 일을 경험하였으나 간관(諫官)에게 매를 치고 욕함을 듣지 못하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을 것이니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매는 면하게 하고 전라도(全羅道) 여수 돌산수(突山戌)로 유배하였다. 지윤(池奫) 등이 생각하기를 상촌선생은 반드시 낭사(郎舍)와 더불어 의논하였을 것이라 하여 또 간의대부(諫議大夫) 정우(鄭寓)를 경상도(慶尙道) 죽림수(竹林戌)로 유배하였다. 해가 지나자 편의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고 고신(告身)을 환급해 주었다.
이후 상촌은 고향인 안동에서 유유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소일하였다. 이 시기에 지은 선생의 시에서 당시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新樓壓水對靑山(신루압수대청산) 새로운 다락은 물을 굽어보고 청산을 마주하는데,
朝暮烟嵐궤案間(조모연람궤안간) 아침저녁으로 연기와 아지랑이 책상 위에 머무네.
幸有村庄재隔岸(행유촌장재격안) 다행히 촌장(村庄)은 언덕 하나에 사이 하였으니,
暮年投불共淸閒(모년투불공청한) 늙으막엔 인수(印綬) 내 던지고 한가함 함께 하리라.
이때 이곳을 들린 정몽주(鄭夢周)는 상촌의 생활을 부러워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永嘉好水又佳山(영가호수우가산) 영가(永嘉)는 물도 좋고 산도 좋구나.
恨未移居向此間(한미이거향차간) 이곳에 옮겨 살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客路再過頭已白(객로재과두이백) 나그네 길 다시 지나니 머리는 벌써 희였구나.
羨君樓臥作長閒(선군루와작장한) 그대의 다락에 누워 한가함을 부러워하도다.
상촌선생이 과거에 합격하자 이색은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지어 축하하였으며, 상촌선생의 은문(恩門)인 염흥방(廉興邦)이 이에 대한 답례로 연회를 마련하여 그를 초청하자 이색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斯門盛會世無多(사문성회세무다) 사문(斯門)의 장한 모임 세상에 많지 않아서,
每向東亭簇玉珂(매향동정족옥가) 동정(東亭)을 찾으면 인재가 가득하더라.
桃李門庭移日語(도리문정이일어) 도리(桃李)의 문정(門庭)에서 늦도록 말을 나누는데,
綺羅絃管알雲歌(기라현관알운가) 비단결 같은 관현(管絃)은 구름도 멈춰서서 노래하네.
滿前才俊今如許(만전재준금여허) 뜰 앞에 가득한 재준(才俊)들 이제는 얼마나 되는지,
居右衰遲我奈何(거우쇠지아내하) 상석에 앉은 나는 늙고 병들었으니 어찌할꼬.
泥醉夜深歸柳里(이취야심귀유리) 크게 취하여 깊은 밤에 유리(柳里)로 돌아오니,
洗空塵慮세天河(세공진려세천하) 티끌 같은 마음 말끔히 씻기니 은하수가 다가서네.
상촌은 이색의 문하에서 많은 학문을 교류한다. 상촌은 이색을 찾아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한다. 이에 이색은 크게 기뻐하면서 자(字)에 대한 설(說)을 지어 주었는데, 그 주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갑인년(甲寅年) 장원(壯元) 김정언(金正言)이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은 자수(子粹)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字)를 순중(純仲)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선생께서는 그 뜻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수는 마음속 깊이 이를 간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 내가 말하기를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은 하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바가 또한 얕지 않으니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늘의 명(命)은 심원(深遠)하여 쉬지 않는다. 비록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고 크면서도 빠뜨림이 없으니, 어찌 주재(主宰)하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상(象)을 보이는 것과 풍우와 상뇌(霜露)가 가르침을 주는데 있어 어찌 일찍이 조그마한 어김이라도 있었던가. 비록 꾸짖는 것이 위에서 보이고 재앙이 아래에서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잠깐일 뿐이요, 그 생성(生成)하고 함육(涵育)하는 조화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와 같으니, 그 다함이 없는 것과 순일(純一)한 것을 알 수 있다. 건괘(乾卦)의 대상(大象)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자강(自强)하여 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사람에게 바라는 바가 깊다 하겠다. 군자(君子)가 자강(自强)하면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으면 폐(廢)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폐하지 않는 것은 그 지극한 데에 이르자는 것이다.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하늘보다 후에 하더라도 천시(天時)를 받들어 행하니, 하늘이 바라는 묘한 이치가 이에 나타난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니 주공(周公)이 어찌 나를 속였으랴”하였다. 주공이 문왕을 스승으로 하여 역(易)의 괘효(卦爻)를 찬(讚)하였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을 스승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악(禮樂)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주공의 뜻을 따르는 바이다.
붉은 신발을 보더라도 진중한 모양을 갖춘다면 마음이 어찌 순일(純一)하지 않겠는가. 문왕이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교화를 파장결부(破장缺斧)의 때에도 행하니, 이로써 풍속을 바꾸어 다시 바른 데로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바로 이것은 순일하여 쉬지 않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럼으로 말하기를 “역경(易經)에 처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주공(周公) 같은 성인(聖人)도 이와 같은 때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디를 쫒아서 그 효(孝)를 성취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있겠는가?
아! 순일한 법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순중(純仲)이 장원(壯元)에 뽑히어 언관(言官)이 되었으니, 가히 현달(顯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 후에 버림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 마음은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자설(字說)을 지어 권면하는 바이니, 지킴이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지킴이 있으면 순일(純一)하여 질 것이다.
상촌이 이색을 생각하며 지은 시.
東國文章集大成(동국문장집대성) 동국(東國)의 문장을 집대성하였으니,
稼亭父子冠群英(가정부자관군영) 가정(稼亭)의 그 부자가 모든 문인(文人)의 으뜸이었네.
山川孕秀今猶古(산천잉수금유고) 산천의 품은 정기는 지금도 옛과 다름 없는데,
借問何人繼盛名(차문하인계성명) 묻노니 어느 사람이 그 이름을 이을꼬.
정몽주는 공양왕 4년 4월 이성계를 문병하고 귀가하는 도중에 이방원(李芳遠)이 보낸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피살되었다. 이것은 바로 고려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상촌은 좌상시(左常侍)와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재직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하였고, 정몽주가 피살되고 조선이 건국되자 상촌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정몽주는 상촌과 비록 15세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는 상촌을 벗으로 예우하였고, 상촌 또한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예(禮)를 다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상촌이 안동(安東)으로 낙향하였을 때 그가 직접 안동으로 찾아와 위로하였고,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 서 그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지은 상촌의 시에서도 보인다. 이때 상촌은 정몽주를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고 있다.
烏川先生傑作(오천선생걸작) 오천선생(烏川先生 : 정몽주)의 작품은 훌륭하도다.
字화整整斜斜(자화정정사사) 자(字)와 획이 바르고도 비스듬하도다.
道德優遊聖域(도덕우유성역) 도덕(道德)은 성역(聖域)에서 자유로이 놀고,
篇章獨步詩家(편장독보시가) 문장(文章)은 시가(詩家)에서 홀로 뛰어났도다.
壁間喜看濃墨(벽간희간농묵) 벽사이에서 농묵(濃墨)을 즐겁게 보고,
板上恨未籠紗(판상한미농사) 마루[板上]위에서는 농사(籠紗)를 한탄치 않는구료.
屹屹高山仰止(흘흘고산앙지) 우뚝하게 높은 산[포은을 지칭] 우러러 보니,
顔衰正怯年華(안쇠정겁년화) 나이 늙어 얼굴이 쇠하니 참으로 두렵도다.
박상충은 상촌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다. 이는 상촌이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의 시중을 위하여 성균관을 퇴관할 때 상촌을 아쉬워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귀근(歸覲)하는 생원(生員) 김자수(金子粹)를 보내면서(送生員金子粹歸覲安東)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염흥방은 상촌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상촌이 과거에 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 그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연회를 베풀어 전송하였고, 또 그가 행례(行禮)를 행할 때는 상촌으로 하여금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일찍이 그가 연회를 베풀 때 상촌을 직접 보내어 이색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이색은 몸이 불편하여 참가하지 못하였고, 이색은 상촌의 장원 연회에 참석치 못한 아쉬움을 시로 표현했다.
少壯元招老壯元(소장원초노장원) 젊은 장원[金子粹]이 늙은 장원[李穡]을 초대하는데,
壯元郞又特傳言(장원랑우특전언) 장원랑(壯元郞)이 또 특별히 말을 전하는구나.
斯爲盛事足驚世(사위성사족경세) 이것은 장한 일이라 세상을 놀라게 할만 하지만,
只恨病軀難出門(지한병구난출문) 다만 병든 몸이 문밖을 나가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聚散却同萍與水(취산각동평여수) 만나고 헤어짐은 흡사 물과 부평초 같으며,
閑忙只合酒盈樽(한망지합주영준) 바쁘고 한가함은 술이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은가.
四支調適知何日(사지조적지하일) 사지(四支)는 어느 때나 제대로 풀릴 것인가.
風雨蕭蕭獨의軒(풍우소소독의헌) 풍우(風雨)가 소소(蕭蕭)한데 홀로 마루에 기댔도다.
문익점과 상촌과의 관계는 상촌이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깊은 교유가 있었고 상촌보다 20여년 이상의 연상이었지만, 상촌의 학문과 인품을 사랑하여 마치 벗과 같이 대하였다. 이것은 일찍이 상촌이 여묘(廬墓)생활을 마치자, 이를 위로하면서 보낸 김정언(金正言) 순중(純仲)의 여묘(廬墓)를 위문하며(慰問金正言純仲廬墓)라는 시에서 알 수 있다.
권근은 상촌과 막역한 벗으로 지냈다. 권근은 상촌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과거는 5년이 앞서는 공민왕 18년(1369)에 급제하였다.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막역하게 지냈다.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고, 상촌은 이색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허물없는 지기(知己)로 교유하였다.
이들은 우왕을 섬길 때 왕에게 직언(直言)으로 간하였고, 이로써 상촌은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되었으며, 그도 왕의 미움을 받게 된다.
상촌이 정언(正言)을 제수 받고 고향으로 떠날 때 권근이 이를 아쉬워하며 지은 시다.
匹馬千山路(필마천산로) 필마(匹馬)로 첩첩산길을 돌아가는데,
孤鴻八月秋(고홍팔월추) 외로운 기러기 날으니 팔월의 가을이로다.
歸寧之子迫(귀녕지자박) 부모를 찾아 떠나는 그대이니 무척도 바쁠 터이지만,
惜別故人愁(석별고인수) 작별을 아쉬워함은 친구의 심정일레라.
芋栗村中樂(우율촌중락) 토란과 밤 등은 마을에서의 즐거움이고,
박로物外遊(박로물외유) 순채와 농어회로 세상 밖에서 노닐테지.
也應同去광(야응동거광) 필시 함께 광을 떠나가면서,
笑我自悠悠(소아자유유) 나 홀로 유유(悠悠)하다고 비웃을 테지.
조계생(趙啓生)은 공민왕 12년(1363)에 출생하여 창왕 즉위년(138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자(字)는 경부(敬夫)이고,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그는 상촌의 후학으로 항상 그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면서 교유하였다. 일찍이 상촌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생각하면서 한산제영(韓山題詠)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의 운(韻)을 차(次)하여
山傍熊津疊장成(산방웅진첩장성) 산은 웅진강(熊津江)을 끼고 첩첩병장 이루어,
終敎李氏품其英(종교이씨품기영) 마침내 이씨일문(李氏一門) 그 영기(英氣)를 타고 났도다.
自從父子登科後(자종부자등과후) 저 멀리 원(元)나라에서 부자(父子)가 모두 등과(登科)하니,
天下皆知此邑名(천하개지차읍명) 천하(天下)는 모두 이 고을의 이름을 알게 되었네.
라는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이문화(李文和)는 인주인(仁州人)으로 자(字)는 백중(伯中)이며, 호(號)는 오천(烏川)이다. 우왕 6년(1380)에 염흥방(廉興邦)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상촌에게는 동문(同門) 후배가 된다. 그도 일찍부터 이색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이색도 그를 위하여 자(字) 백중(伯中)에 대한 설(說)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그는 상촌을 선배로 받들어 존경하였다.
상촌이 일찍이 의성(義城) 문소루(聞韶樓)에서 정몽주(鄭夢周)의 판상운(板上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문화는 이때 시를 지어 화답하고 있다.
聞韶山水蕭灑(문소산수소쇄) 문소(聞韶)의 산수(山水)는 맑고도 깨끗하여,
夜靜簾소月斜(야정렴소월사) 밤은 고요한데 발[簾]은 성기고 달은 기울었네.
柳色靑靑客舍(유색청청객사) 버들잎 푸릇푸릇한 객사(客舍)
香烟苒苒僧家(향연염염승가) 향기로운 내음이 승가(僧家)에서 은은히 스미네.
憂民便爲鶴髮(우민편위학발) 백성걱정에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得雨還岸烏紗(득우환안오사) 비를 만나 강안(江岸)에 돌아온 검은 모자,
六月未成一事(육월미성일사) 여섯달 동안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却참前後皇華(각참전후황화) 다만 앞뒤의 황화(皇華)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김진양(金震陽)은 계림부인(鷄林府人)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초려(草廬) 또는 초옥자(草屋子)라 하였고, 동두(童頭)라고도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이색의 문하(門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제수받았다. 이후 서해도(西海道) 안렴사(安廉使)와 문하사인(門下舍人)을 거쳤고, 공양왕이 즉위하자 좌사의(左司議)에 올랐다. 공양왕 3년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되고, 이어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을 탄핵하는 글을 올려 유배시켰고, 이어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공양왕 4년(1392)에는 이색, 정몽주 등과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정몽주와 이색의 당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김진양은 상촌보다 3년 먼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이들은 서로 벗으로 지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식견도 뛰어났고 성격이 유달리 강개하였는데, 이점에서 상촌과는 항상 통하였고, 또 그는 이색의 문생(門生)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상촌이 일찍이 빙허루(憑虛樓)에서 김사고(金師古)의 운(韻)을 차(次)하여 시를 지었는데, 김진양도 더불어 같이 시를 지었다.
此樓臨水又依山(차루임수우의산) 이 다락은 물에 다달았고 산도 의지하였으니,
仁智兼全二樂間(인지겸전이락간) 인지(仁智)는 이요(二樂)를 아울러 가졌도다.
欲識主人成德處(욕식주인성덕처) 주인의 큰 뜻 이룬 뜻을 알고 싶어 하거들랑
軒裳不動一心閑(헌상부동일심한) 벼슬에도 동하지 않는 마음, 한가함을 보려므나.
정복주(鄭復周)는 동래인(東萊人)으로 자(字)는 사고(師古)이고, 호(號)는 죽당(竹堂) 또는 육괴(肉塊)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강개하였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는데 엄격하였다. 상촌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그가 일찍이 전라(全羅) 도관찰사(都觀察使) 장자충(張子忠)의 막사로 떠날 때 상촌은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지은 시이다.
惜別贈何物(석별증하물) 이별의 아쉬움 무엇으로 증별(贈別)할 건가.
一盃千里春(일배천리춘) 한잔의 술에 천리의 봄 담아 보내노라.
島夷方梗化(도이방경화) 섬 오랑캐들 바야흐로 찍자부리고 있나니,
須使自來賓(수사자래빈) 모름지기 스스로 감화되어 오도록 하려므나.
라는 시를 지어 전송하고 있다.
상촌은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우뚝한 학자였다. 그는 성리학의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당시 그와 교유한 선후배의 석학들도 그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하였고, 또한 앞으로 유도(儒道)를 일으킬 거목(巨木)으로 평가하였다.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조정에 나아가서는 직언(直言)으로 왕을 보필하였고, 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상제(喪制)를 치루었다.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은 평생토록 지켜온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그가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끝까지 조선에는 사환(仕宦)하지 않았고, 태종의 부름을 거부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의 학문은 공민왕 23년(1374)의 과거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 이미 그 기반은 닦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학문적으로 대성(大成)할 수 있었던 것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받은 감화가 컸을 것이다.
우왕 원년에 그가 정언(正言)을 제수받고, 이색을 찾아가서 그의 자(字) 순중(純仲)에 대한 설(說)을 부탁하였는데, 이때 이색은 그의 학문의 깊이에 대하여 칭찬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색은 처음에 “나는 비유하면 제패(제稗)와 같다. 학문이 조잡하고 말이 망발되니, 어찌 그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거절하였으나,
상촌이 제가 들으니 ‘나타나지 않음이여! 문왕(文王)의 순수한 덕(德)이여!'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는 대개 문왕(文王)의 업적이 하늘의 뜻에 부합한 묘함을 찬양한 것입니다. 배우는 자로서는 감히 바랄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문왕(文王)을 기다려서 일어나는 것이 평범한 백성이니, 저도 어찌 평범한 백성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말을 써서 자(字)를 순중(純仲)이라 하였는데, 대개 강건(剛健)하고 정중(中正)하며, 순수(純粹)하고 정(精)한 것은 건(乾)의 덕(德)입니다. 건(乾)의 덕(德)은 문왕(文王)의 덕(德)과 같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이색은 그가 학문의 대도(大道)를 깨우친 것을 알고 기뻐하면서 "선비는 현인(賢人)이 되기를 바라고, 현인(賢人)은 성인(聖人)이 되기를 바라며, 성인(聖人)은 하늘같이 되기를 바란다. 순중(純仲)이 자부하는 것 또한 얕지 않으니 말이 없을 수 없다." 라고 하며 설(說)을 지어 주고 있다.
위에서 볼 때 그는 이때 이미 성리학의 정수(精髓)를 체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건괘(乾卦)의 논리를 차(借)하여 자(字)로 하였고, 또 천(天)의 이치를 문왕(文王)의 덕(德)과 비유하면서 자신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생활철학으로 하여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성리학 이념을 실현시키겠다는 그의 의지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것은 공민왕 20년에 편모(偏母)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장례를 치르고 있는 것에서도 보인다. 이때 행한 그의 행적은 당시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가 3년 동안 시묘(侍墓)할 때 이를 직접 목도한 남을진(南乙珍)은
來見居廬子(내견거려자) 내려와서 시묘(侍墓)하는 사람을 보니,
점前祭禮明(점전제례명) 거적자리에 제례(祭禮)도 밝더라.
筍生誠意근(순생성의근) 죽순이 난 것은 정성이 간절함이며,
栢枯孝心傾(백고효심경) 잣나무 마른 것도 효성이 지극함이지.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예법(禮法)과 효행을 기리고 있다.
당시 고려사회의 사상적 이념은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에서 당시 이색, 정몽주 등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고려사회의 사상적인 구조를 개변시키려고 하였으며, 또 이러한 의도에서 이들은 공민왕 16년에 교육중흥을 일으켰다. 당시 이들에게 주어진 명제는 성리학의 이념에서 나타나는 의리(義理)의 실천과 이단(異端)의 배척이었다. 그 또한 이러한 이념의 실천을 자기의 본분으로 삼아 이를 몸소 실천하였고, 또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서 이의 실현을 건의하였다.
상촌은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정명사상(正命思想)과 의리(義理)의 실천을 자신의 생활철학으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활은 세상에서 용납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것은 의성(義城)에 있는 김전서(金典書) 유(游)에게 보낸 제문(祭文)에서도 보인다.
返我初服(반아초복) 나의 초복(初服)으로 돌아오니,
薇蕨其志(미궐기지) 미궐(薇蕨) 같은 그 심지(心志)요.
樂我名敎(낙아명교) 나의 명교(名敎) 즐기니,
與世相違(여세상위) 세상과는 괴리(乖離)가 있었도다.
상촌선생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올라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을 겸하고 있을 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당면 정치의 개혁안 시무 5개 조항을 올렸다.
첫째, 왕대비(王大妃)에 대한 예(禮)를 존숭함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도록 건의하였고,
둘째, 봉숭도감(奉崇都監)을 설치하여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려는데 대하여 이는 차서(次序)를 문란하게 하는 것이라 하여 그 설행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으며,
셋째, 왕의 숭불정책에 대한 부당성을 논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수축을 중지하도록 건의하였고,
넷째, 무당들의 행패를 근절시키고 이들의 궁중출입을 금하도록 건의하였고,
다섯째, 지금까지 직언(直言)으로 폄출된 자들을 소환하도록 건의하였다.
공양왕(恭讓王) 4년(1392)에 좌상시(左常侍)로 전보되었을 때 상촌은 동료들과 함께 왕에게 건의하였다.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10인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들로서 요행히 함부로 천거된 자 들입니다. 이들은 혹은 창기(倡妓)에 의탁하거나 혹은 친척의 연분으로 청탁하여 벼슬을 요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방편상 이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게 되니, 진차(眞差 : 眞職과 假職)와 첨설(添設)이 문득 100여 자리나 되었습니다. 이로써 명기(名器)의 범람함과 염치의 상실함이 극에 이르게 되었으니, 원컨대 이들을 유사(有司)에 회부하여 그 직을 모두 박탈하여 장래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또 삼사(三司)의 관원수가 15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녹패(錄牌)에 서명하는 일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중외의 전곡(錢穀) 출납(出納)은 먼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고, 사사(使司)는 이를 삼사사(三司使)에 이첩하여 회계를 정밀히 조사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도록 하게 한다면 재정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놀고 먹는 관리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건의를 올렸다.
왕은 상촌의 건의를 수용하였고, 바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임명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낙향한 후 상촌은 고려 태조(太祖)의 릉(陵)을 참배하기도 하고, 또 송악산(松岳山)을 찾아 유유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春風騫馬看山客(춘풍건마간산객) 봄바람에 절뚝거리는 말을 타고 산을 바라보는 이 나그네,
步步遲來萬樹陰(보보지래만수음) 걸음을 천천히 하여 마침내 만수(萬樹)의 그늘에 이르렀네.
澗畔林深無怪石(간반림심무괴석) 시냇가의 숲은 깊으나 괴이한 돌은 없고,
장崖花落摠新禽(장애화낙총신금)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
三盃酒氣論今日(삼배주기논금일) 석잔의 주기(酒氣)를 빌어 오늘을 논하는데,
一曲松聲報古琴(일곡송성보고금) 한곡조 송성(松聲)은 옛날 거문고 소리 들려주네.
故國蒼茫如昨事(고국창망여작사) 고국(故國)은 아스라하여 어제의 일과 같나니,
忠臣烈士共爭吟(충신열사공쟁음) 충신 열사들은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네.
상촌은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산비탈에 꽃이 지니 모두가 새로 보는 새들 뿐일세'라고 하여 고려가 망하자 새로운 사람들이 지조 없이 날뛰고 있음을 개탄하고는 '충신 열사는 모두 다투어 회포를 읊는다' 라고 하면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고 있다.
또 그는 부조현(不朝峴)에 올라서
忠臣烈士今安在(충신열사금안재) 충신과 열사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飛去山禽語古春(비거산금어고춘) 날아가는 산새들도 옛 봄을 노래하네.
玉階花心風後老(옥계화심풍후노) 옥계(玉階)의 꽃술들은 바람 뒤에 시들었고,
金陵樹色雨中貧(금릉수색우중빈) 금릉(金陵)의 나무 빛깔은 빗속에 파리하네.
應知日短淸香閣(응지일단청향각) 알괴라 청향각(淸香閣)에는 해가 짧아졌을 것이고,
想必天寒觀德人(상필천한관덕인) 필시 관덕인(觀德人)에게도 날씨는 차가울 것이라.
感淚振衣臺上客(감루진의대상객) 대(臺) 위에 선 이 길손은 강개한 마음에 옷을 떨치는 도다.
此時幾泣我王身(차시기읍아왕신)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
라는 시를 지었다.
상촌은 위의 시에서 '충신 열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이때를 당하여 몇 번이나 우리 임금 생각하고 울었던가'라고 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토로하고 있다. 또 상촌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릉(陵)을 참배하고
修德就閒後(수덕취한후) 덕(德)을 닦느라 벼슬길 떠난 뒷일망정,
臣維安獨歸(신유안독귀) 신(臣)만이 어찌 혼자 돌아가겠소이까.
榛령爲誰詠(진령위수영) 진령(榛령)은 누구를 위하여 읊겠는가.
葵藿自春開(규곽자춘개) 규곽(葵藿)은 봄부터 피어있구려.
泣下風雲淚(읍하풍운루) 풍운(風雲)의 눈물 수 없이 흘리면서,
踏來塵劫灰(답래진겁회) 진세(塵世)의 겁회(劫灰)를 밟아 왔다오.
侍陵將뢰酒(시릉장뢰주) 능침(陵寢)을 모시고 술잔을 올리니,
北斗影徘徊(북두영배회) 북두(北斗)의 그림자가 배회(徘徊)하네.
라는 시를 지어 역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기리고 있다.
고려가 망할 무렵 桑村先生은 遺仗(유장)에 다음과 같은 詩句(시구)로 忠臣의 마음을 表現하고 있다.
桑村의 遺杖詩
平一疑雲(평일의운) 고려말의 어지러운 시국을 말함
老當益壯(노당익장) 늙음을 맞이해도 더욱 장건할 것이며
窮當益堅(궁당익견) 궁함을 당해도 더욱 굳건하리라.
嗟爾吾與(차이오여) 슬프다! 너와 내가 더불어
無替永年(무체영년)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조선초 선생을 헌장으로 명하였으나, 상촌은 “나라가 망하니 忠義도 더불어 망하는 구나. 내가 平生에 忠孝를 기약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고 탄식하고는 서울로 向하였다.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 이르자 자손들에게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臣下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이곳에 매장하고 비석은 세우리 말라”고 유명(遺命)하였다. 이어
平生忠孝意(평생충효의) 평생토록 지킨 충효(忠孝),
今日有誰知(금일유수지)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일사오휴한) 한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마는,
九原應有知(구원응유지)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라는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후학(後學)인 황희(黃喜)는
有忠有孝難(유충유효난) 충(忠)이 있으면서 효(孝)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유효유충난) 효(孝)가 있으면서 충(忠)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이자기운득)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어 가졌었건만,
황又殺身難(황우살신난) 하물며 살신(殺身)의 어려움까지야.
라는 만사(挽詞)를 지어 先生의 殉節(순절)함을 哀悼(애도)하였다.
경주김씨 상촌공파종중(이하 '종중')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정보주체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지침을 수립·공개합니다.
가. 수집하는 개인정보의 항목
첫째, 회사는 원활한 고객상담, 각종 서비스의 제공을 위해 온라인문의시 아래와 같은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 이름, 이메일, 연락처
둘째, 서비스 이용과정이나 사업처리 과정에서 아래와 같은 정보들이 자동으로 생성되어 수집될 수 있습니다
→ IP Address, 쿠키, 방문 일시, 서비스 이용 기록, 불량 이용 기록
나. 개인정보 수집방법
회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합니다.
→ 홈페이지, 팩스, 전화, 상담 게시판, 이메일
→ 협력회사로부터의 제공
회사는 수집한 개인정보를 다음의 목적을 위해 활용합니다.
1. 고객문의 처리
2. 서비스 제공에 관한 계약 이행 및 서비스 제공에 따른 요금정산 콘텐츠 제공
3. 회원 관리 : 개인 식별, 가입 의사 확인, 불만처리 등 민원처리, 고지사항 전달
4. 마케팅 및 광고에 활용 : 신규 서비스(제품) 개발 및 특화, 이벤트 등 광고성 정보 전달
회사는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2. 개인정보의 수집목적 및 이용목적"에서 고지한 범위 내에서 사용하며, 이용자의 사전 동의 없이는 동 범위를 초과하여 이용하거나 원칙적으로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래의 경우에는 예외로 합니다.
- 법령의 규정에 의거하거나, 수사 목적으로 법령에 정해진 절차와 방법에 따라 수사기관의 요구가 있는 경우
이용자의 개인정보는 원칙적으로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되면 지체 없이 파기합니다. 단, 다음의 정보에 대해서는 아래의 이유로 명시한 기간 동안 보존합니다.
- 회사 내부 방침에 의한 정보보유 사유
- 관련법령에 의한 정보보유 사유
상법,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등 관계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경우 회사는 관계법령에서 정한 일정한 기간 동안 회원정보를 보관합니다. 이 경우 회사는 보관하는 정보를 그 보관의 목적으로만 이용하며 보존기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대금결제 및 재화 등의 공급에 관한 기록
→ 보존 이유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 보존 기간 : 5년
2. 소비자의 불만 또는 분쟁처리에 관한 기록
→ 보존 이유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
→ 보존 기간 : 3년
3. 본인확인에 관한 기록
→ 보존 이유 :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 보존 기간 : 6개월
4. 웹사이트 방문기록
→ 보존 이유 : 통신비밀보호법
→ 보존 기간 : 3개월
이용자의 개인정보는 원칙적으로 개인정보의 수집 및 이용목적이 달성되면 지체 없이 파기합니다. 회사의 개인정보 파기절차 및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파기절차
- 이용자가 온라인 문의 등을 위해 입력한 정보는 목적이 달성된 후 별도의 DB로 옮겨져(종이의 경우 별도의 서류함) 내부 방침 및 기타 관련 법령에 의한 정보보호 사유에 따라(보유 및 이용기간 참조)일정 기간 저장된 후 파기됩니다.
- 동 개인정보는 법률에 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보유되는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습니다.
나. 파기방법
- 종이에 출력된 개인정보는 분쇄기로 분쇄하거나 소각을 통하여 파기합니다.
- 전자적 파일 형태로 저장된 개인정보는 기록을 재생할 수 없는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여 삭제합니다.
- 이용자 및 법정 대리인은 언제든지 등록되어 있는 자신 혹은 당해 만 14세 미만 아동의 개인정보를 조회하거나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이용자 혹은 만 14세 미만 아동의 개인정보 조회, 수정을 위해서는 개인정보관리책임자에게 서면, 전화 또는 이메일로 연락하시면 본인 확인 후 지체 없이 조치하겠습니다.
- 이용자가 개인정보의 오류에 대한 정정을 요청하신 경우에는 정정을 완료하기 전까지 당해 개인정보를 이용 또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또한 잘못된 개인정보를 제3 자에게 이미 제공한 경우에는 정정 처리결과를 제3자에게 지체 없이 통지하여 정정이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 회사는 이용자 혹은 법정 대리인의 요청에 의해 해지 또는 삭제된 개인정보는 "4. 개인정보의 보유 및 이용기간"에 명시된 바에 따라 처리하고 그 외의 용도로 열람 또는 이용할 수 없도록 처리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개인화되고 맞춤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이용자의 정보를 저장하고 수시로 불러오는 '쿠키(cookie)'를 사용합니다. 쿠키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는데 이용되는 서버가 이용자의 브라우저에게 보내는 아주 작은 텍스트 파일로 이용자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됩니다.
가. 쿠키의 사용 목적
이용자들이 방문 및 이용형태, 이용자 규모 등을 파악하여 이용자에게 최적화된 정보 제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나. 쿠키의 설치/운영 및 거부
- 이용자는 쿠키 설치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용자는 웹 브라우저에서 옵션을 설정함으로써 모든 쿠키를 허용하거나, 쿠키가 저장될 때마다 확인을 거치거나, 아니면 모든 쿠키의 저장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 다만, 쿠키의 저장을 거부할 경우에는 일부 서비스는 이용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쿠키 설치 허용 여부를 지정하는 방법(Internet Explorer의 경우) → [도구] 메뉴에서 [인터넷 옵션]을 선택합니다.
- [개인정보 탭]을 클릭합니다.
- [개인정보취급 수준]을 설정하시면 됩니다.
회사는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취급함에 있어 개인정보가 분실, 도난, 누출, 변조 또는 훼손되지 않도록 안전성 확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기술적/관리적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가. 해킹 등에 대비한 대책
회사는 해킹이나 컴퓨터 바이러스 등에 의해 회원의 개인정보가 유출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개인정보의 훼손에 대비해서 자료를 수시로 백업하고 있고, 최신 백신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나 자료가 누출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방지하고 있으며, 암호화 통신 등을 통하여 네트워크상에서 개인정보를 안전하게 전송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침입차단시스템을 이용하여 외부로부터의 무단 접근을 통제하고 있으며, 기타 시스템적으로 보안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기술적 장치를 갖추려 노력하고있습니다.
나. 취급 직원의 최소화 및 교육
회사의 개인정보관련 취급 직원은 담당자에 한정시키고 있고 이를 위한 별도의 비밀번호를 부여하여 정기적으로 갱신하고 있으며, 담당자에 대한 수시 교육을 통하여 경주김씨상촌공파종회 개인정보취급방침의 준수를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회사의 서비스를 이용하시며 발생하는 모든 개인정보보호 관련 민원을 개인정보관리책임자 혹은 담당부서로 신고하실 수 있습니다. 회사는 이용자들의 신고사항에 대해 신속하게 충분한 답변을 드릴 것입니다.
▶ 개인정보 관리책임자
→ 이름 : 김민정
→ 전화 : 031-719-9162
→ 메일 : alswjd851104@naver.com
▶ 개인정보 관리책임 담당자
→ 이름 : 김민정
→ 전화 : 031-719-9162
→ 메일 : alswjd851104@naver.com
기타 개인정보침해에 대한 신고나 상담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아래 기관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 (www.118.or.kr / 118)
→ 정보보호마크인증위원회 (www.eprivacy.or.kr / 02-580-0533~4)
→ 대검찰청 첨단범죄수사과 (www.spo.go.kr / 02-3480-2000)
→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 (www.ctrc.go.kr / 02-392-0330)
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은 2024. 07. 01 적용됩니다.